독도 역사의 시작
독도 역사의 시작
울릉도와 더불어 독도는 우산국을 역사적 기원으로 하고 있다. 우산국의 성립연대와 발전과정 등은 명확하게 밝혀지진 않았으나, 울릉도의 남서리 고분군, 현포리 고분군 등 일부 지역에서 시행된 지표조사와 시굴조사에서 지석묘, 무문토기편, 붉은간토기 등의 고고학적 사료가 확인되었다. 아직 정밀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해 당시의 생활상을 유추할 수 있는 유물의 발굴이 충분치 않으나,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고려사(高麗史)』 등의 문헌자료에는 우산국의 복속과정과 쇠퇴를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우산국에 대한 현존 사료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삼국사기로, 해당 내용은 다음과 같다.
“13년 여름 6월, 우산국(于山國)이 복종하여 해마다 토산물을 공물로 바치기로 하였다. 우산국은 명주(溟州)의 정동쪽 바다에 있는 섬으로 울릉도라고도 한다. 땅은 사방 백 리인데,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항복하지 않았다. 이찬 이사부가 하슬라주 군주가 되어 말하기를
‘우산국 사람은 어리석고도 사나워서 힘으로 다루기는 어려우니 계책으로 복종시켜야 한다.’ 라고 하고, 바로 나무로 사자를 가득 만들어 전함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 해안에 이르렀다. 이사부는 거짓으로 말하였다. ‘너희가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이 사나운 짐승을 풀어 밟아 죽이겠다.’ 그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즉시 항복하였다.”
이 기사를 통해 적어도 5세기에는 울릉도에 해상세력을 주축으로 한 집단이 이미 거주하고 있었고, 신라의 우산국 원정을 계기로 우산국과 한반도의 본격적인 내왕이 늦어도 6세기 초에는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울릉도와 독도 및 주변 해역에서 해상세력을 이루고 있던 우산국이 신라에 복속된 후 신라문화가 우산국에 지속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특히 통일신라시대의 금동불상은 내륙의 찬란한 불교문화가 우산국에 유입되었음을 입증한다. 이는 울릉도와 독도를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해양도서민들이 내륙과 활발히 왕래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산국이 신라의 영토로 편입된 후 본토에서 어떤 방식으로 이들을 통치했는지에 관한 직접적 증거자료는 없다. 하지만 주현의 설치를 통한 직접적 통치이거나, 토착세력의 독자성을 인정하는 간접통치였을 가능성이 높다. 신라하대에는 중앙정부가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잃고 각 지방의 호족세력이 등장하게 되는데, 우산국 역시 그러한 추세에 따라 반독립적인 상태에 놓였을 것으로 짐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