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계승과 외세의 침입
고려의 계승과 외세의 침입
고려시대에도 울릉도와 독도는 우산국 혹은 우릉성으로 불리며 관리되었다. 고려시대 우산국의 상황은 『고려사(高麗史)』에 기록된 우산국과 관련한 기사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고려사』 권 1 태조 13년(930년)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우산국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우릉도에서 백길 토두가 방물을 바치니, 백길은 정위에 토두는 정조에 배하였다.”
상기한 “울릉도에서 온 백길과 토두”는 우산국의 지배세력으로 이해된다. 이들이 한반도에 새로운 왕조인 고려가 건립되자 방물을 바친 것은 고려의 속국으로서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고려는 이들에게 정위(正位)와 정조(正朝)라는 관직을 하사함으로서 우산국과 군신관계를 형성하였다.
11세기 초가 되자 우산국은 동북여진족의 지속적인 침입을 받게 되었다. 이에 따른 피해로 농업의 기반이 흔들린 우산국은 고려에 지원 요청을 하였고, 고려는 농기구를 지원하여 우산국을 안정화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고려의 방안은 우산국 주민의 생계를 일시적으로 안정시키기 위한 미봉책이었다. 당시 고려는 거란과의 전쟁으로 인해 군사를 파견하여 우산국 주민을 보호하기 어려웠다. 여진족은 지속적으로 우산국을 약탈했고, 우산국 주민은 육지로의 이주를 계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高麗史)』권 5 덕종 1년(1032년)의 “우릉성주가 아들 부어잉다랑(夫於仍多郞)을 보내어 토물을 바쳤다.”라는 기록을 끝으로 우산국의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고려는 우산국이 멸망하고 난 후 울릉도와 독도에 사람이 살지 않는다는 것을 인지하고 고려인들을 정착시키고자 했다. 사람들이 살기 어려운 척박하고 위험한 환경으로 인해 고려의 이주정책은 원활하게 진행되지 못했으나,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고려인들이 울릉도에 정착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와 관련하여 『고려사(高麗史)』권 58 지리지 동계 울진현조와 『고려사』권 129 고종 33년(1246년)의 기록을 함께 볼 필요가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1157년(의종11년) 왕이 ”울릉도는 땅이 넓고 비옥하며, 옛날 주현이 있었던 곳으로 가히 백성이 살만하다“는 말을 듣고, 명주도감창 김유립을 보내어 보고 오게 하였다. 유립이 돌아와서 아뢰기를 ”섬 가운데 큰 산이 있고, 산 정상에서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기까지 일만여보, 서쪽으로는 일만삼천여보, 남쪽으로는 일만오천여보, 북쪽으로는 팔천여보 있습니다. 촌락의 터가 7군데 있었으며, 석불·철종·석탑이 있었습니다. 시호·호본·석남초가 많이 납니다. 그러나 암석이 많아 백성이 거주하기에는 마땅치 않습니다.“하니 그에 대한 의논이 멈췄다. 일설에는 우산 무릉이 본래 두 섬으로 서로 거리가 멀지 않아 날씨가 좋으면 바라볼 수 있다고 한다.
“국학학유 권형윤과 급제 사정순을 울릉도안무사로 삼았다.”
위 사료에 따르면 고려는 관리를 보내 울릉도를 자세히 조사했고, 사람이 살기에 척박하다는 것을 인식했음에도 백성을 거주하게 했음을 알 수 있다. 안무사는 민심을 수습하거나 수령의 잘잘못을 살피기 위해 파견된 임시직으로, 울릉도에 안무사를 파견함은 고려의 백성들이 그곳에 살고 있었고 고려가 울릉도민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자 했음을 뜻한다.
고려가 몽고의 침입으로 겪게 된 원간섭기(13세기 후반부터 14세기 전반) 동안에도 울릉도와 독도는 고려에서 계속 관리했다. 원나라에서 고려에 대목(大木)을 요구함에 따라 울릉도의 나무들이 벌목되기도 했다. 여기에는 벌목을 위해 투입된 본토민을 비롯하여 이전에 고려 정부에 의해 본토에서 이주해 있던 사람들, 그리고 여진족 침입 이후 살아남았거나 본토로 피난갔다가 돌아온 우산국사람들이 동원되었을 것이다.
14세기에 고려는 원나라의 영향력에서 벗어났으나, 왜의 침입으로 인해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본격적인 개발에 착수하지 못했다. 결국 1392년 새로운 왕조 조선이 건국됨에 따라 울릉도와 독도 문제는 조선이 정책적으로 풀어가야 할 과업으로 남게 되었다.